국내 유류 시장의 절반을 점유한 대형 정유사들이 국제유가 급변기를 틈타 44조 원대 석유제품 가격을 담합한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 심판대에 올랐다. 단순한 가격 담합을 넘어 정유업계의 오랜 유통 관행인 '사후정산' 거래 방식과 2021년 도입된 정보교환 담합 규정이 정면 충돌하는 첫 대형 사건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6년 10월 7일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의 휘발유·경유·등유 담합 사건에서 심사관의 행위 사실과 조치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위원회에 제출하고 두 회사에 송부했다. 심사관은 두 회사의 행위를 '중대한 위반행위'로 판단해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부과 의견을 제시했다. 함께 조사를 받았던 GS칼텍스와 에쓰오일(S-OIL)은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제재 대상에서 제외됐다.
4년간 정보 교환… 전쟁 직후엔 직접 가격 합의
공정위 조사 결과 두 회사는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전부터 2026년 3월 미국-이란 전쟁 직후까지 약 4년간 휘발유·경유·등유의 판매가격 정보를 상호 교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환 대상에는 주유소와 도매상에 석유제품을 먼저 공급할 때 매기는 '입금가'와 익월 초 거래액을 최종 정산하는 '확정가', 판매정책 할인 정보가 망라됐다.
나아가 2026년 3월 미국-이란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는 두 차례에 걸쳐 실제 공급가격인 입금가를 사전에 직접 합의한 혐의도 드러났다. 오행록 공정위 카르텔조사국장은 "전쟁 상황에서는 국제유가가 급변하기 때문에 이 부분이 정보교환을 시작하게 된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지 않았나 보고 있다"며 "미국-이란 전쟁 발발 후에는 두 차례에 걸쳐 입금가를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관련 매출만 44조 원… 유통 관행 맞선 정면 충돌
이번 담합 혐의의 영향을 받은 유류 매출액은 약 44조 1,000억 원에 달한다. 하루 평균 300억 원 규모다. 지난해 기준 국내 정유 4사의 시장 점유율은 약 98%로, 이 가운데 SK에너지가 28.1%, HD현대오일뱅크가 21.0%를 차지해 두 회사의 합산 점유율만 49.1%에 이른다. 종전 과징금 부과 고시 기준율인 최대 10.5% 미만을 단순 적용할 경우 산술적으로 조 단위 과징금이 거론되는 배경이다.
정유업계와 공정위는 거래 구조를 둘러싸고 팽팽히 맞서고 있다. 정유사와 대리점·주유소 간 거래는 먼저 입금가로 결제한 뒤 월말 시장 상황을 반영해 확정가로 차액을 정산하는 '사후정산' 방식을 취한다. 정유업계는 시장에 이미 노출된 가격 정보를 바탕으로 사후 정산하는 고유 관행일 뿐 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율한 담합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HD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교환된 정보가 사후 정보였다며 "담합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혐의를 전면 부인했고, SK에너지 측은 "향후 전원회의 등 심의 절차에 성실히 임해 사실관계와 입장을 충실히 소명하겠다"고 전했다.
신설 정보교환 조항 첫 시험대… 8주간 방어권 행사
법조계에서는 이번 심의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 제40조 제1항 제1호의 명시적 가격담합뿐 아니라 제9호의 '정보교환 담합' 규정이 실제 시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가늠할 중대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본다. 가격이나 거래 조건을 주고받아 시장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했는지가 핵심 쟁점이다. 검찰 또한 두 정유사의 유류 가격 담합 혐의를 수사해 재판에 넘긴 상태다.
피심인인 두 정유사는 심사보고서를 받은 날부터 8주 이내에 서면 의견서를 제출하고 증거자료 열람·복사를 신청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다. 공정위는 피심인들의 의견서 제출 등 절차가 끝나는 대로 최고 의결기구인 전원회의를 열어 법 위반 여부와 과징금 액수를 최종 결정할 방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