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동료의 부탁으로 개인 용도로 쓰라며 통장과 선불폰 유심을 빌려줬다가 수천만 원대 배상 책임을 질 위기에 놓이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동료가 건네받은 통장과 유심을 보이스피싱 조직에 돈을 받고 팔아넘긴 탓이다. 계좌 명의인은 영문도 모른 채 피해자들로부터 4,300만 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사건에서 형사 처벌과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은 별개로 전개된다. 명의인은 대가 없이 통장을 건넸다는 사정이 인정돼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에서 검찰의 혐의없음 처분을 받더라도 안심하기 이르다. 타인에게 유심을 제공한 행위 자체가 전기통신사업법 제30조 위반에 해당해 벌금 200만 원의 약식기소 처분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처분은 민사 재판에서 방조 과실을 인정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민법 제750조와 제760조 제3항은 고의나 과실로 타인의 불법행위를 도운 자에게 공동불법행위 책임을 묻는다. 법원이 대포통장 명의인의 배상 책임을 일률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은 2015년 1월 선고한 판결(2012다84707)에서 명의자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사용될 것을 충분히 예견하면서 통장을 넘겼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힘들다면 피해액 전부를 배상할 책임은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범죄 이용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과실 비율에 따라 70%에서 80% 안팎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기도 했다(2013다86489).

피해자들로부터 소장을 송달받은 명의인은 소장 부본을 받은 날부터 30일 이내에 법원에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답변서에는 검찰의 전자금융거래법 불기소 이유서를 증거로 첨부해 통장을 건넬 당시 범죄 악용 상황을 전혀 예견할 수 없었음을 조리 있게 소명해야 한다. 검찰의 무혐의 처분은 민사 소송에서 고의나 과실에 따른 공동불법행위 성립을 탄핵하는 핵심 방어 자료다.

실제 범행 원인을 제공한 직장 동료 A 씨에게는 민사소송법 제84조 제1항에 따른 소송고지 절차를 활용할 수 있다. 재판 진행 중 법원에 신청해 A 씨에게 소송고지를 해 두면 판결의 효력이 A 씨에게도 미친다. 향후 명의인이 피해자들에게 일부 배상하더라도 지급한 금액 전액을 A 씨에게 구상금으로 청구하기 수월해지는 셈이다. 피해자들이 A 씨를 피고로 넣지 않았다면, 명의인이 직접 A 씨를 상대로 불법행위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거나 수사기관에 사기 및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추가 고소해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타인에게 계좌나 유심을 넘기는 행위는 사적 친분에 따른 호의라 하더라도 무거운 법적 분쟁을 부른다.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은 타인의 통신용으로 유심을 넘기는 행위를 형사처벌 대상으로 규정하며, 계좌가 범죄에 악용되는 순간 수천만 원 규모의 민사 배상 청구에 휘말린다. 금전적 대가를 받지 않았더라도 명의를 대여하는 일 자체를 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