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후 가해자가 현장을 이탈해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형사합의를 진행할 때,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서면에 넣었다면 피해자는 기존 구두 협의를 거절하고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 서명이나 합의금 수령 전 조건이 어긋났다면 합의가 최종 성립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피해자 A 씨는 후방 추돌 후 도주한 가해 차량을 블랙박스로 특정해 경찰에 신고했다. A 씨는 목과 허리 부상으로 입원하고 차량 수리를 맡긴 뒤, 보험사 대인·대물 처리는 별도로 유지하고 형사사건에 대해서만 500만 원에 합의하기로 가해자와 구두 협의했다. 그러나 가해자가 보내온 합의서 초안에는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권 포기', '향후 민·형사상 이의 제기 금지', '경찰에 진단서 미제출'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A 씨가 항의하자 가해자는 문구 수정을 약속했으나, A 씨는 신뢰 훼손을 이유로 기존 금액 조건을 거절하고 재협상이 가능한지 법률 자문을 구했다.

법률 전문가들은 합의금 지급과 서명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초 협의와 다른 조항이 포함됐다면 최종 합의의 불성립을 주장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법률사무소 로유 배희정 변호사는 "합의금 지급과 서명이 아직 없더라도 구체적 금액과 조건에 대해 최종 합의가 성립했는지는 대화 전체를 봐야 하지만, 상대방이 민사상 청구권 포기 및 진단서 미제출 등 다른 내용을 넣었다면 기존 500만 원 조건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다툴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단순히 처벌을 빌미로 압박하기보다 치료자료와 사건 경위를 기준으로 정당한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무상 형사합의서를 작성할 때는 문구 검토가 필수적이다. '민·형사상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부제소 문구가 들어가면 보험사를 상대로 한 치료비와 수리비 청구 자체가 차단될 위험이 있다. 대법원 판례(95다8850)에 따르면 형사합의금은 별도 특약이 없으면 민사상 손해배상금의 일부로 추정돼 향후 보험금에서 전액 공제될 수 있다. 피해를 방지하려면 '본 합의는 순수한 형사상 처벌불원에 관한 것이며, 자동차종합보험에 의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는 별도로 한다'는 문구를 명시해야 한다.

경찰 수사 단계에서 상해 진단서를 제출하는 문제 역시 합의 여부와 별개로 판단할 수 있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3 제1항 제2호는 업무상과실치상죄를 범한 운전자가 피해자를 구호하지 않고 도주해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 1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500만 원 이상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수사기관에 진단서를 제출해 정식 입건된 이후에도 검찰 수사나 법원 재판 단계에서 형사합의를 진행할 수 있으므로, 가해자 요구에 따라 증거 제출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