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이 무산되면 낸 돈을 전액 돌려주겠다는 종이 한 장을 쥐고 조합 사무실을 찾았던 이들은 사업이 멈춰선 뒤에야 그 증서에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깨닫는다. 1심에서 청구가 기각된 뒤 항소심에 이른 한 사건에서도 비슷한 사정이 드러났다. 사업계획 승인이 나지 않으면 계약금 전액을 반환하겠다는 확약서를 믿고 3,000만 원을 납부했으나, 돌아온 것은 사업 지연과 반환 거절뿐이었다.
지역주택조합 사업은 토지 확보 실패나 인허가 지연 등 변수가 많아 일반인의 가입 기피가 심하다. 이에 추진위원회와 업무대행사는 조합원을 모으려고 추가 분담금이 없다거나 사업 실패 시 납부금을 100% 돌려주겠다는 이른바 안심보장증서를 경쟁적으로 내건다. 가입자는 이 서류를 확실한 안전장치로 믿고 목돈을 건네지만, 현실에서 이 문서는 법적 효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믿었던 보장증서가 무효가 되는 이유
법적으로 주택조합의 재산은 조합원 전체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총유물이다. 민법 제275조와 제276조 제1항에 따르면 총유물의 관리와 처분은 정관이나 규약에 정한 바가 없으면 반드시 총회 결의를 거쳐야 한다. 대법원 2025. 8. 14. 선고 2024다292679 판결 등에서 명시했듯, 장래에 총유물인 분담금 자체를 반환하거나 이전하겠다는 채무부담행위 역시 총유물의 처분행위에 해당하므로 총회 결의가 없으면 무효다.
문제는 대다수 추진위원회가 정식 조합 총회를 열지 않은 상태에서 임의로 안심보장증서를 발급한다는 점이다. 추진위원회 단계에서는 의결 기구 자체가 완비되지 않았거나 적법한 결의 절차를 밟기 어려워 위원장 명의 등으로 문서를 발행하곤 한다. 결국 가입자가 손에 쥔 문서는 조합 재산을 처분할 권한이 없는 자가 임의로 만든 무효 서류에 불과하다. 증서 자체를 근거로 약정금을 달라고 요구했을 때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다.
기망과 착오를 입증해야 하는 까닭
위 사건의 1심 재판부는 계약서에 사업 일정이나 계획이 변경될 수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고, 가입자가 미반환 위험을 인지한 상태에서 서명했다는 피고 측 주장을 받아들여 청구를 기각했다. 추진위원회와 업무대행사는 계약서에 적힌 업무대행비 불반환 조항까지 내세우며 반환을 거부했다. 1심 판단대로라면 가입자는 허위 확약에 속아 돈을 건네고도 위험을 감수한 스스로의 탓으로 돌려야 하는 처지였다.
항소심에서는 단순한 약정금 청구를 넘어, 총회 결의 없이 발행되어 무효인 증서를 마치 유효한 것처럼 교부해 계약 체결을 유도한 행위 자체가 민법 제110조의 기망행위에 해당한다는 점을 다투었다. 대법원 2022. 3. 17. 선고 2020다288375 판결은 총회 결의 없이 발급된 안심보장증서가 무효일 때 환불보장약정이 없었더라면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정이 인정되면 민법 제137조에 따라 가입계약 전체가 무효가 된다고 판단했다.
사업 무산 시 전액 환불이라는 확약이 없었다면 3,000만 원이라는 거액의 계약금을 낼 이유가 없었다는 동기의 착오와 사기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했다. 아울러 분양 현장에서 상담사들이 허위 고지에 직접 개입한 사실을 입증해 민법 제756조에 따른 업무대행사의 사용자책임도 물었다. 추진위원회뿐만 아니라 업무대행사에도 부진정연대책임을 물어 집행력을 확보하기 위한 취지였다.
뒤집힌 판결과 원상회복의 범위
항소심 법원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1심 패소 판결을 취소했다. 추진위원회와 업무대행사가 공동하여 계약금 3,000만 원과 소장 부본 송달일 다음 날부터의 지연손해금을 지급하고 소송 총비용도 피고들이 부담하라는 판결이 선고되었다. 법원은 안심보장증서가 계약 체결의 결정적 동기였으며, 무효인 약정을 유효한 것처럼 제시한 행위는 위법한 기망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업무대행비 공제 주장이 완전히 배척되었다는 점이다. 조합 측은 계약서에 업무대행비는 어떠한 경우에도 환불되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으므로 최소한 그 금액은 공제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나 사기나 착오로 계약 자체가 취소된 이상 계약 조항의 효력도 사라지므로, 원상회복 단계에서는 그러한 공제 조항이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이 명확히 확인되었다.
안심보장증서의 효력과 대응 기준
유사한 분쟁을 겪고 있다면 가입 당시 교부받은 안심보장증서나 확약서의 효력부터 살펴야 한다. 총회 결의를 거쳤다는 명시적 기재나 총회 의사록이 첨부되어 있지 않다면 그 문서는 법적으로 무효일 가능성이 높다. 무효인 문서를 근거로 추진위원회에 환불을 독촉하기보다, 계약 자체의 기망 취소나 일부무효 법리를 적용해 납입금 반환을 청구해야 한다.
대응 시점 역시 결과를 가르는 핵심 변수다. 대법원 2025. 5. 15. 선고 2024다239692 판결과 대법원 2025. 12. 24. 선고 2025다216757 판결 등 최근 판례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한다. 안심보장증서가 무효라는 사실이나 환불 조건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음에도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며 분담금을 계속 납부하거나 동·호수 변경에 합의했다면, 뒤늦은 취소 주장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배척될 수 있다. 하자를 인지한 즉시 추가 납입을 멈추고 법적 조치를 검토해야 하는 까닭이다.
사업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초기 단계에서 무효인 보장증서로 가입을 유도하는 모집 관행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1심에서 패소했더라도 법리를 정밀하게 검토하면 부당하게 묶인 납입금을 반환받을 길이 있다.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책임을 회피하는 거래 관행 앞에서 계약자는 서류 뒤편의 법적 효력을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