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법원에서 날아온 우편물 한 통에 일상이 흔들리는 이들이 있다. 서류를 열어보면 보이스피싱 사기 피해자가 제기한 수천만 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장이 들어 있다. 사기 조직에 속아 통장 정보나 체크카드를 건넸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범죄의 공범처럼 취급받으며 거액을 배상해야 할 피고가 된 것이다.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자산 환급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이 개정 시행되는 등 사기 범죄 근절을 위한 제도적 압박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해외에 거점을 둔 총책이나 주범을 검거하기 어려운 탓에, 피해자들은 피해금을 회수하고자 국내에서 신원이 확인되는 계좌 명의인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하곤 한다. 사기로 명의를 도용당한 사람과 사기로 돈을 잃은 피해자 사이에 법정 공방이 벌어지는 배경이다.

실제 사기 조직에 속아 계좌 정보가 범죄에 이용된 한 피고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로부터 공동불법행위자로 지목되어 2,5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당했다. 범죄에 연루된 억울함에 더해 거액의 배상 채무까지 떠안을 상황이었다.

과실에 의한 방조가 성립하는 기준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이 성립하려면 민법 제750조에 따른 고의 또는 과실이 증명되어야 한다. 나아가 민법 제760조 제3항은 불법행위 방조자도 공동행위자로 보아 손해배상 책임을 지우도록 규정하며, 민사상 방조는 고의뿐 아니라 과실로도 성립할 수 있다. 피해자 측은 통장 명의자가 접근매체를 넘긴 행위 자체가 범죄를 도운 과실 방조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순히 계좌가 범죄에 쓰였다는 사실만으로 민사 배상 책임이 성립하지는 않는다. 대법원은 2012다84707 판결 및 2013다91597 판결 등에서 계좌 명의인에게 과실 방조 책임을 묻기 위한 기준을 정립했다. 접근매체를 양도할 당시의 구체적 사정에 비추어 명의자가 해당 거래의 불법 사용을 예견할 수 있었는지, 그 행위와 피해자의 손해 발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지를 개별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취지다.

법원은 과실로 불법행위를 용이하게 한다는 사정에 대한 예견가능성과 피해 발생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해 배상 책임이 과도하게 확대되지 않도록 신중히 판단한다. 명의자 역시 사기 조직에 속았고 불법성을 인식하기 어려웠다면 과실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결과를 가른 객관적 정황 자료

소송의 핵심은 고의와 중대한 과실이 없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데 있었다. 피고 측은 사기 조직과 사전에 공모하지 않았고 범죄 가담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관계를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금융 거래 내역과 당시 사기 조직과 주고받은 대화 내역을 제출해 기망에 의해 계좌 정보가 이용된 경위를 소명했다.

아울러 해당 거래로 어떠한 경제적 이득도 얻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법 제741조의 부당이득 반환 측면에서도 계좌로 들어온 돈이 명의자에게 귀속되지 않고 범죄 조직으로 빠져나갔음을 입증했다. 계좌 명의인이 범행 가담이나 불법 사용을 예견할 수 없었고 실질적 이득을 취하지 않은 경우 배상 책임을 기각해 온 하급심 판례(서울북부지방법원 2024가단138840 판결 등)의 법리도 원용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피고에게 민사상 불법행위 책임이나 과실에 따른 배상 의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하고, 원고의 2,500만 원 손해배상 청구를 전부 기각했다.

피소 시 확인해야 할 실무 조치

보이스피싱 사건에 연루되어 민사 소장을 받았다면 세 가지를 확인해야 한다. 첫째, 소장을 송달받은 날부터 30일 이내에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억울하다는 이유로 방치하면 민사소송법상 자백간주 규정에 따라 상대방 청구 금액이 그대로 인정될 수 있다.

둘째, 접근매체를 건네게 된 경위를 보여주는 문자메시지, 통화 녹음, 메신저 대화 캡처 등 초기 객관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대출이나 구직 과정에서 속았던 정황 등 당시 범죄를 의심하기 어려웠음을 증명해야 과실과 상당인과관계를 반박할 수 있다.

셋째, 해당 계좌로 입금된 돈 중 자신이 취한 경제적 이득이 전혀 없다는 점을 금융 거래 내역으로 밝혀야 한다.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 제3항이 금지하는 대가성 대여가 아니라 기망당한 피해자 지위에 있었음을 소명해야 민사상 방조 책임을 벗을 수 있다.

보이스피싱 피해는 중대하지만, 그 과정에서 명의를 도용당한 또 다른 피해자에게 무조건 손해를 떠넘기는 것 또한 법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억울한 판결을 막으려면 초기부터 구체적인 사실관계 증명과 엄격한 법리 해석으로 대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