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택조합의 기망 행위로 가입계약을 취소한 피해자들이 신탁사에 묶인 납입금을 실질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법원은 계약이 취소됐다면 까다로운 '분담금' 반환 규정이 아니라 계약 미체결 상태의 '신청금' 환불 조항을 적용해야 하므로 추진위원회가 신탁사에 환급 동의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서울고등법원은 A지역주택조합 추진위원회 가입자들이 A추진위원회와 B신탁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2025나208792). 원고들은 추진위원회를 상대로 신탁사에 환급 동의 통지를 할 것을 구하고, 신탁사에는 통지를 수령하면 납입금 상당액을 지급하라고 청구했다.

사실관계

A추진위원회 가입자들은 조합 측 기망을 이유로 계약을 취소하고 납입한 분담금 상당액을 배상하라는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추진위원회 자체의 자력이 부족한 데다 조합원들이 낸 돈은 B신탁회사의 자금관리계좌에 보관돼 있어 실제 강제집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가입자들은 A추진위원회가 B신탁회사에 갖는 신탁수익금 등 채권 일체에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을 받았다. 종전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신탁사는 추진위원회의 사전 서면동의 등 자금관리계약상 절차 요건이 없으면 추심채권자에게 지급을 거절할 수 있었다. 이에 가입자들은 민법과 민사집행법에 근거해 추진위원회의 동의 의사표시를 강제하는 소송을 냈다.

재판부 판단

재판부는 A추진위원회와 B신탁회사가 맺은 자금관리대리사무계약상 납입금 반환 조항의 성격을 구분해 살폈다. 해당 계약은 계약 체결 전 예치한 '신청금'은 추진위원회의 확인 절차만 거치면 요건 없이 환불(제11조)하도록 한 반면, 사업비로 편입된 '분담금'은 사업 외 유출을 막기 위해 출금을 엄격히 제한(제13조)하고 있었다.

재판부는 조합 측 귀책으로 계약이 취소된 때에는 계약의 유효를 전제로 한 제13조가 아니라 계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 관한 제11조가 유추 적용된다고 봤다. 계약이 처음부터 무효로 돌아간 이상 정식 조합원의 탈퇴나 제명에 따른 분담금 반환 절차를 강요할 수 없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A추진위원회는 납입금 반환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부수적으로 또는 그 이행의 전제로서 조합원들이 B신탁회사에 보관 중인 사업자금으로부터 채권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협력할 의무를 부담한다"며 "자금관리계약 제11조에서 정한 동의의 의사표시를 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판결 의의

이번 판결은 계약 취소 확정판결을 받고도 신탁사의 '동의 요건 미비' 항변에 가로막혀 돈을 회수하지 못하던 지주택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판결이 확정되면 의사 진술을 명하는 판결의 효력에 따라 추진위원회의 환급 동의가 간주되므로 신탁사를 상대로 추심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