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기업 눈치를 보지 않고 매도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보고서에서 작성자 이름을 빼는 익명 발행 제도가 도입된다. 대형 증권사에는 연간 발간하는 리서치보고서의 4분의 1 이상을 중소형주(스몰캡)로 채우도록 의무화해 생산적 금융으로 자금 유입을 유도한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2026년 9월 30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변제호 금융위 자본시장국장 주재로 제2차 ‘금투업권 모험자본 역량강화 협의체’ 회의를 열었다. 금융당국은 이날 논의한 ‘리서치보고서 독립성·신뢰성 제고 및 중소형주 커버리지 확대 방안’을 10월 1일 발표했다. 회의에는 금융당국과 자본시장연구원, 9개 종합금융투자사업자(한국투자·미래에셋·NH투자·KB·하나·키움·신한투자·삼성·메리츠증권), 4개 중소기업 특화 증권사 관계자가 참석했다.
리서치 독립성 규정 상향과 익명 매도 허용
금융당국은 먼저 금융투자협회 자율규정에 머물던 ‘리서치 부서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 행사 금지’ 원칙을 행정제재 권한이 따르는 금융위원회 고시인 「금융투자업규정」으로 상향 입법하기로 했다. 리서치 예산이 특정 영업부서나 기업금융(IB) 부서 수익에 과도하게 좌우되는 구조를 차단하고, 애널리스트가 영업부서 업무를 지원할 때는 사전신고와 사후 점검을 거치도록 내부통제를 강화한다.
매도 의견을 낸 애널리스트가 법인영업 부서나 조사 대상 기업으로부터 부당한 압박을 받지 않도록 ‘익명 선택제’도 신설한다. 준법감시인의 사전 승인을 받으면 보고서 표지에 작성자 성명을 적지 않아도 된다. 다만 금융사고를 막고 내부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실제 작성자 정보와 승인 내역은 사내 시스템에 기록해 의무 보관해야 한다. 이와 함께 애널리스트 성과평가에서 영업 실적 개입을 전면 배제하고 목표주가 괴리율 등 객관적 지표를 반영한다. 괴리율 우수 애널리스트 상위 5명을 주기적으로 공시하도록 제도도 정비한다.
스몰캡 25% 의무화와 발행어음 인가 연계
종합금융투자사업자를 대상으로 한 ‘스몰캡 커버리지 최소비율’ 규제도 마련됐다. 대형 증권사는 연간 발간 보고서의 25% 이상을 코스피 시가총액 300위 미만 또는 코스닥 시가총액 150위 미만 종목으로 채워야 하며, 그중 절반 이상은 코스닥 종목에 배정하는 방안이 검토된다. 기업공개(IPO)를 주관한 증권사가 상장 기업 보고서를 의무 공표해야 하는 기간도 현행 상장 후 1년(2회 이상)에서 3년(매년 2회 이상)으로 대폭 늘린다.
금융당국은 규제 이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인책과 인허가 심사를 결합했다. 연간 스몰캡 리서치 발간 비율이 40% 이상인 종투사에는 당해연도 모험자본 의무비율 산정 시 중소·벤처 공급액의 5%를 가산해 인정하기로 했다. 향후 신규 종투사 지정이나 단기금융업(발행어음) 인가 심사 때도 외부평가위원회 평가항목에 스몰캡 리서치 발간 계획을 정식 반영한다.
모험자본 11.6조 돌파…질적 개선 과제
이번 대책은 국내 리서치 시장의 심각한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마련됐다. 금융위 집계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발간된 국내 보고서 8만 5,030건 중 시가총액 1~100위 대형주 비중이 48.5%(4만 1,239건)에 달한 반면 시총 300위 미만 중소형주는 17.2%(1만 4,648건)에 그쳤다. 미국 등 외국계 증권사의 매도 보고서 비중이 10%를 넘는 것과 달리 국내 증권사의 매도 의견 비중은 1% 미만으로 사실상 ‘매수 일색’에 머물러 왔다.
이날 함께 점검한 2026년 2분기 기준 7개 기존 종투사의 모험자본 공급 실적은 11조 6,183억 원으로 집계됐다. 1분기(9조 6,467억 원)보다 2조 168억 원(20.4%) 증가한 수치다. 발행어음 및 종합투자계좌(IMA) 조달액 대비 모험자본 공급비율은 평균 19.5%를 기록해 7개사 모두 올해 법정 의무비율인 10%를 웃돌았다. 다만 공급 유형 중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 등 보증채권과 담보대출 비중(3조 4,000억 원)이 가장 높아, 금융당국은 향후 고위험 벤처 지분투자에 실적인정비율을 우대하는 ‘위험도 비례 실적인정체계’ 도입을 검토할 방침이다.
업계 우려와 준법감시 점검 포인트
증권업계에서는 실효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인베스트조선 등 언론 보도에 따르면 증권가에서는 코스닥 상장사 상당수가 적자 기업인 상황에서 강제로 비율을 맞추다 보면 질 낮은 보고서가 양산돼 투자자 피해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업종별 담당 연구원이 1~2명에 불과한 시장 현실상 이름을 가려도 작성자를 쉽게 알 수 있어 매도 의견을 낼 유인이 크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제도 변화에 따라 증권사 사내 준법감시와 법무 부서의 대응도 분주해질 전망이다. 리서치 부서 개입 금지 의무가 금융투자업규정으로 상향되면 위반 시 기관경고나 과태료 등 행정제재 대상이 되므로 내부통제기준을 전면 재정비해야 한다. 매도 보고서 무기명 발행을 위한 준법감시인 사전 승인 절차와 원본 기록 관리, 애널리스트의 영업부서 지원 시 정보교류 차단(차이니즈 월) 체계 확립이 실무 핵심 과제로 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