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보증금이 집주인의 자금 조달 창구로 쓰이며 빚어진 대규모 전세사기 여파로 제도의 존폐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 일각에서는 전세의 수명이 다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반면 보증 요건 강화와 정보 비대칭 해소로 서민의 주거 사다리를 지켜야 한다는 시장의 요구도 거세다. 이에 따라 제도는 폐지 대신 위험을 걸러내는 방향으로 재편되는 흐름이다.

12조 원 넘은 대위변제와 갭투자의 붕괴

전세 제도가 존폐 기로에 선 배경에는 사금융에 기댄 무자본 갭투자의 연쇄 파탄이 자리한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유상범 의원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서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2026년 7월 기준 전세보증 누적 대위변제액은 12조 414억 원(5만 7,032건)으로 집계됐다. 2건 이상 사고를 낸 다주택 채무자 관련 대위변제액만 6조 7,993억 원으로 전체의 56%에 달했다.

저금리 시기 전세대출 확대와 HUG의 100% 보증 구조는 집값 상승기 무자본 갭투자의 통로가 됐다. 2022년 하반기 기준금리 인상과 집값 하락이 맞물리자 신규 세입자의 보증금으로 기존 보증금을 돌려막던 다주택자들의 연쇄 파산이 이어졌다.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대규모 전세사기를 저지른 남모(64) 씨는 148억 원대 사기 혐의로 2025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이 확정(2024도15455)됐다. 이어 세입자 372명에게서 305억 원을 편취한 혐의 등으로 2026년 7월 31일 서울고법 인천원외재판부 형사2부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폐지론과 주거 사다리론의 충돌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정부 당국자들은 전세 무용론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은 2023년 5월 16일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전세 제도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해온 역할이 있지만 이제는 수명을 다한 게 아닌가 보고 있다"고 밝혔고,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도 2025년 6월 26일 국회에서 "전세 제도는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며 건전한 월세 시장 육성을 강조했다.

반면 임차인의 주거비 안정을 위해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전세가 사라지면 임차인이 매달 고액 월세를 감당해야 해 가처분 소득이 줄고 자산 형성 기회가 차단된다는 이유에서다. 시장 전문가들은 사기 피해의 본질이 제도 자체보다 집값에 육박하는 보증금을 걸러내지 못한 거래 구조와 임대인 정보의 비대칭에 있다고 짚는다.

보증선 90% 축소와 특별법 보완

실제 정책 방향은 제도 폐지 대신 안전장치를 강화해 유지하는 쪽으로 굳어졌다. 국토교통부와 HUG는 2023년 5월부터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의 담보인정비율 상한을 기존 100%에서 90%로 낮췄다. 공시가격 적용 비율 140%를 감안하면 주택 공시가격의 126%를 초과하는 전세계약은 보증 가입이 차단된다. 가입 기준 강화 효과 등으로 2024년 3조 9,948억 원까지 치솟았던 HUG 대위변제액은 2025년 1조 7,935억 원으로 줄었으며, HUG는 2025년 결산에서 1조 5,766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해 4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제도적 안전망도 법률 개정을 거치며 두터워졌다. 국회는 2024년 8월 28일 본회의에서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경매차익을 활용해 피해자에게 공공임대 무상거주를 지원하는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2026년 4월 23일에는 임차보증금의 3분의 1 미만을 회수한 피해자에게 차액을 지원하는 임차보증금 최소보장제와 신탁사기 피해자를 위한 선지급-후정산 제도를 도입했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의7을 통해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납세증명서 제시를 요구할 권리도 명문화됐다.

실무 포인트: 계약 전 검증 필수

전세 제도가 유지되는 만큼 임차인과 거래 실무진의 주의 의무는 더욱 무거워졌다. 임차인은 전세계약을 맺기 전 주택 공시가격의 126% 기준을 넘지 않는지 살펴 HUG 반환보증 가입 가능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아울러 안심전세 앱과 주택도시기금법 제26조의3을 활용해 집주인의 보증사고 이력과 체납 세금, 선순위 채권을 사전에 검증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