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양홍보관에서 흔히 건네받는 서류가 있다. 사업이 무산되더라도 낸 돈을 전액 돌려주겠다는 '안심보장증서'다.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 약속은 거절하기 힘든 안전장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업이 기약 없이 표류하고 약속한 환불을 요구하는 순간, 돌아오는 대답은 조합 규약상 환불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다. 홍보관 직원의 장담만 믿고 계약했다가 1심에서 패소해 1차 계약금 3,000만 원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가입자의 사례도 드물지 않다.
무효인 보장증서와 가입계약의 실체
지역주택조합 추진위원회는 법적으로 권리능력 없는 사단에 해당한다. 민법 제275조와 제276조 제1항에 따르면 비법인사단의 재산은 조합원 전체의 총유에 속하며, 총유물의 관리와 처분은 반드시 총회 결의를 거쳐야 한다. 사업 실패 시 분담금을 전액 환불해 주겠다는 약정이나 확정 분담금 약정은 조합 재산을 잠재적으로 처분하는 중대한 행위다. 따라서 총회 결의 없이 추진위원회 명의로 발급된 안심보장증서는 법률상 처음부터 무효다.
믿었던 증서가 법적으로 무효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가입자들은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에 부딪힌다. 과거 일부 하급심 법원 역시 안심보장증서가 무효라 하더라도 조합가입계약 자체는 별개로 유효하다고 보아 가입자의 청구를 기각하곤 했다. 앞선 1심 패소 판결 역시 이러한 판단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대법원이 확립한 법률행위의 일체성
그러나 대법원 2022년 3월 17일 선고 2020다288375 판결은 실무상 혼선을 정리했다. 대법원은 환불보장 약정이 총회 결의 없이 이루어져 무효라 하더라도, 가입계약과 경제적·사실상 일체로 체결되었다면 민법 제137조의 법률행위 일부무효 법리가 적용된다고 보았다. 환불 보장이 없었더라면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사정이 인정된다면 가입계약 전체가 무효가 된다는 취지다.
총회 결의를 거치지 않아 지킬 수 없는 약속임을 알면서도 이를 숨긴 채 조합원을 모집한 행위는 민법 제110조 제1항의 기망행위이자, 민법 제109조 제1항이 정한 법률행위 중요 부분의 착오에 해당한다. 자체 재원이 부족한 추진위원회가 구조적으로 분담금을 전액 반환할 능력이 없음에도 이를 장담한 행위 자체가 기망이다. 항소심 소송에서는 업무대행사 직원의 허위 고지가 추진위원회의 기망으로 귀속된다는 점과 함께 이러한 법리가 핵심 쟁점으로 다투어졌다.
계약 취소와 업무대행비 반환의 문제
조합 측이 흔히 내세우는 방어 논리 중 하나는 업무대행 용역비 불반환 조항이다. 계약서에 어떠한 경우에도 업무대행비는 반환하지 않는다는 특약이 적혀 있다는 이유로, 설령 돈을 돌려주더라도 수천만 원에 달하는 용역비는 공제하겠다고 맞선다. 일반 가입자들은 이 문구에 부딪혀 권리 행사를 주저하기도 한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분명하다. 안심보장증서의 취지는 분담금 상실 위험을 완전히 없애 준다는 신뢰를 제공한 것이며, 사기나 착오를 이유로 가입계약 자체가 소급하여 취소된 이상 탈퇴나 제명을 전제로 한 공제 조항은 적용될 수 없다. 항소심 법원은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추진위원회와 업무대행사가 공동하여 계약금 3,000만 원과 지연손해금을 전액 반환하며 소송 총비용도 피고들이 부담하라고 판결했다. 계약이 적법하게 취소되면 민법 제741조에 따라 피고들이 수취한 금원 전액이 부당이득 반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판례의 흐름과 시간의 한계
다만 최근 판례 흐름을 살필 때 유의할 지점이 있다. 2025년 선고된 대법원 판결들은 안심보장증서의 무효를 이유로 한 취소권 행사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가입자가 환불 약정의 무효를 알지 못했더라도, 사업이 상당 부분 진행되거나 인허가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장기간 분담금을 납부하는 등 계약 유지를 전제로 행동해 왔다면 뒤늦게 무효나 취소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허용되지 않을 수 있다.
조합 측 역시 최근 소송에서 가입자의 모순된 선행 행위를 지적하며 신의칙 위반 항변을 적극 제기하는 추세다. 사업 무산 위험이 드러났음에도 조합의 설명을 믿고 추가 분담금을 계속 납부하거나 사업 변경에 무비판적으로 동의하는 행위는 소송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법은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거나 모순된 태도를 보인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피해를 막기 위해 살펴야 할 점
만약 안심보장증서를 받고 지역주택조합에 가입한 상태라면, 먼저 증서 작성 주체와 총회 결의를 거쳤는지 확인해야 한다. 창립총회나 조합원 총회 회의록에 환불 보장에 관한 정식 결의 내용이 없다면 그 증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무효 문서일 가능성이 높다.
사업 지연을 이유로 추진위원회가 중도금 납부나 추가 계약금 납입을 요구하더라도 섣불리 응해서는 안 된다. 계약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외관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임의탈퇴를 신청해 과도한 위약금을 물기보다는 가입 당시의 기망과 착오를 입증해 계약 취소를 구하는 법적 조치를 신속히 검토해야 한다. 단순한 조합 탈퇴와 계약 취소는 반환받을 수 있는 금액 범위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난다.
내 집 마련이라는 소망을 담보로 실현 불가능한 확약을 앞세우는 불투명한 사업 관행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종이에 적힌 '보장'이라는 문구에 안도하기에 앞서, 그 약속을 뒷받침하는 법적 근거가 갖추어져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