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를 받던 피의자가 지인과 함께 자신의 휴대전화를 발로 밟아 파손했더라도 증거인멸교사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확정됐다. 제3자에게 범행을 시킨 '교사범'이 아니라 현장에서 함께 실행한 '공동정범'으로 봐야 하고, 피고인 자신의 형사사건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는 방어권 보장 차원에서 죄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대법원 제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2026년 10월 8일 증거인멸교사 혐의로 기소된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증거인멸 혐의로 함께 기소된 지인 A 씨에게 벌금 300만 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2026도11543). 검사와 A 씨의 상고는 모두 기각됐다.
사실관계
이 전 대표는 2025년 7월 10일 순직해병 특별검사팀(이명현 특별검사)으로부터 휴대전화를 압수수색당했다. 닷새 뒤인 7월 15일 이 전 대표는 서울 강남구의 한 서비스센터에서 과거 사용하던 구형 휴대전화의 정보를 새 기기로 옮겼다. 이후 서울 서초구 잠원한강공원 주차장에서 기존 구형 휴대전화를 바닥에 던진 뒤 동행한 지인 A 씨에게 파손하라고 지시했다.
이 전 대표와 A 씨는 주차장에서 해당 휴대전화를 번갈아 발로 밟아 부쉈다. A 씨는 부서진 기기를 인근 농구장 쓰레기통에 버렸다. 특검팀은 이 전 대표가 A 씨를 시켜 증거를 없애도록 했다며 증거인멸교사 혐의를 적용했고, A 씨에게는 증거인멸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1심·원심 판단
1심인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6부는 2026년 4월 2일 이 전 대표에게 무죄를, A 씨에게 벌금 300만 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두 사람이 현장에서 함께 휴대전화를 부순 이상 범행을 지시한 교사범이 아니라 함께 저지른 형법 제30조의 공동정범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형법 제155조 제1항이 규정한 증거인멸죄는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없앴을 때만 성립하므로, 피고인이 자기 사건의 증거를 스스로 없애는 행위는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항소심 재판부 역시 2026년 7월 9일 특검과 A 씨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고 1심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대법원 판단
대법원 역시 원심 판단을 수긍했다. 대법원은 이 전 대표가 단순히 파손을 지시한 교사범이 아니라 A 씨와 함께 휴대전화를 파손한 공동정범에 해당한다고 봤다. 이어 피고인 본인의 형사사건 증거를 인멸한 행위는 방어권 보장 차원에서 처벌할 수 없으며, 이번 행위가 방어권 남용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원심에 법리 오해가 없다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로 피의자가 타인에게 자기 증거를 없애 달라고 요청했더라도 현장에서 직접 물리력을 행사해 함께 파손하는 등 실행을 분담하면 '자기 증거 인멸' 법리가 유지돼 처벌을 면하는 반면, 이를 도운 제3자는 타인의 증거인멸죄로 처벌받는 구조가 재확인됐다.
선고 직후 순직해병 특검팀은 공식 입장문을 내고 "대법원이 전원합의체에서 증거인멸 법리의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답해 주기를 바랐으나 전합에 회부되지 않았다"며 판결 결과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