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피해를 당한 뒤 조직원이나 총책의 신원을 당장 밝히지 못해 피해금이 입금된 계좌 명의인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서두르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계좌 명의인의 구체적인 가담 경위나 과실을 입증하지 못한 채 소송을 냈다가는 청구가 기각돼 상대방의 변호사 보수까지 물어줘야 하는 이중 피해를 볼 수 있다.

민사상 책임을 묻는 주된 근거는 민법 제741조의 부당이득반환과 제750조 및 제760조 제3항의 불법행위 방조 손해배상이다. 하지만 법원은 계좌에 피해금이 입금됐다는 사정만으로 명의인에게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질 이득과 과실 입증 기준

대법원은 원인 없이 계좌로 송금된 돈에 부당이득반환 의무가 성립하려면 이득이 명의인에게 실질적으로 귀속돼야 한다고 판단했다(2010다37325). 계좌 명의인이 범죄에 속아 통장을 넘겼고 입금 직후 범죄조직이 돈을 인출하거나 이체해 명의인이 처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면 실질적 이득이 없어 반환 의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불법행위 방조 책임 역시 법리가 엄격하다. 대법원은 단순히 통장 등 접근매체를 타인에게 넘겼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봤다(2013다210671). 자신의 행위로 사기 범행이 실행될 것을 예견할 수 있었는지, 접근매체 교부와 피해자의 손해 발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는지가 엄격히 입증돼야 한다는 판단이다. 통장 명의인이 대출 사기나 구인 광고 등에 속아 대가 없이 계좌를 넘긴 경우 과실과 인과관계가 부정돼 피해자의 청구가 전부 기각된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패소 시 발생하는 소송비용 위험

청구가 기각되면 민사소송법 제98조에 따라 소송비용은 패소한 원고가 부담한다. 피고가 변호사를 선임해 다퉜다면 민사소송법 제109조 제1항과 대법원규칙인 변호사보수의 소송비용 산입에 관한 규칙에 따라 산출된 변호사 보수를 원고가 물어내야 한다.

예컨대 피해자가 3,000만 원 반환을 청구했다가 전부 패소하면 소가 기준에 따라 산정된 226만 원 한도 내에서 피고 측 변호사 보수와 인지액, 송달료를 추가로 물어내야 한다. 소송목적의 값이 2,000만 원 초과 5,000만 원 이하일 때 적용되는 산식(166만 원 + 2,000만 원 초과액의 6%)에 따른 결과다. 소송비용은 판결 확정 뒤 승소한 피고가 법원에 소송비용액확정신청을 내 구체적 지급액이 확정된다.

형사 결과 확인 뒤 신중한 대응 필요

전문가들은 형사 절차에서 통장 명의인의 혐의가 드러나기 전에 섣불리 민사소송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김남오 법무법인 홍림 변호사는 "사기 피해를 보고 돈이 입금됐다는 사정만으로 모든 계좌 명의인에게 배상 책임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며, 계좌가 범행에 어떻게 이용됐는지와 명의자의 행위가 피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인과관계를 자료로 명확히 입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 제3항은 대가를 약속하거나 범죄 이용을 알면서 접근매체를 빌려주는 행위를 금지한다. 위반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피해자는 경찰의 계좌 내역 추적과 통장 명의인의 대가 수수 여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기소 여부 등 형사 수사 결과를 먼저 확인한 뒤 민사상 입증 계획을 세워야 낭패를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