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단체 보조금 사업에서 보조사업자가 설비업체로부터 자부담금을 빌려 냈더라도 이후 차용금을 모두 갚았다면 보조금 부정수급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보조금 교부조건에 제3자 차용 금지 규정이 없는 이상, 정식 약정을 거쳐 빌린 돈을 전액 변제했다면 사업비를 실질적으로 부담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수원지방법원 제12형사부는 2026년 9월 3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 사기, 구 지방재정법 위반, 지방자치단체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축분고속발효기 판매설비업체 대표 A 씨와 축산농가 운영자 등 피고인 22명 가운데 14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2025고합56). 자부담금을 돌려받거나 할인받은 농가 운영자 등 나머지 8명에게는 유죄를 인정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사실관계
연천군, 화성시, 안성시, 파주시, 고성군, 부여군, 강릉시, 영주시 등 11개 지자체는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자연순환 농업 활성화와 악취 저감을 위해 가축분뇨처리 지원사업을 시행했다. 축산농가가 1억 원 안팎의 악취저감설비를 포함한 축분고속발효기를 설치할 때 지자체가 설치비의 50%를 보조금으로 지원하고, 나머지 50%는 농가가 스스로 부담하는 구조였다.
수사기관은 설비업체 대표 A 씨와 농가 운영자들이 공모해 자부담금을 전액 정상 부담한 것처럼 꾸며 합계 15억3,000만 원의 지방보조금을 부정수급한 것으로 보고 이들을 재판에 넘겼다. 일부 농가는 업체에서 4,000만 원에서 1억 원을 빌려 자부담금을 충당했고, 다른 농가는 업체로부터 자부담금 일부를 돌려받거나 할인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재판부 판단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자부담금 조달 방식에 따라 유무죄를 달리 판단했다. 업체로부터 자부담금을 빌려 납부한 농가 운영자 14명과 해당 차용 방식 공소사실에 연루된 A 씨 부분에는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에게 교부된 보조금교부결정서와 교부조건에는 자부담금을 반드시 보조사업자가 자기자본으로 조달하여야 하고 제3자로부터 차용하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고인들이 자부담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업체로부터 금원을 차용하면서 할부금 상환 확약서, 대여금 약정서 등을 작성하였고 피고인들이 그 차용금을 모두 변제하였으므로, 결론적으로 지방자치단체를 기망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지방보조금을 교부받은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보조금 사업의 자부담 원칙은 사업비를 농가 본인이 최종적이고 실질적으로 부담하는 것을 뜻한다. 타인의 자금을 빌려 조달했더라도 그 사정만으로 원칙에 어긋난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지자체 보조금 업무 담당 공무원들도 “농가들에게 보조금을 교부할 당시 자부담금을 반드시 자기자본으로 조달해야 한다거나 제3자로부터의 차용을 금지한다는 안내나 설명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반면 자부담금 가운데 1,000만 원에서 2,500만 원가량을 시공업체로부터 환급(페이백)받거나 할인받아 실질적인 부담을 피하고도 전액 부담한 것처럼 서류를 낸 7개 농가(보조금 5억9,500만 원 상당)와 A 씨에게는 유죄가 인정됐다. 재판부는 A 씨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유죄가 인정된 농가 운영자들에게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등을 선고했다.
판결 의의
대법원은 그동안 자부담 능력이 없으면서 공사업체에서 일시적으로 돈을 빌려 잔고를 채운 뒤 곧바로 인출하는 이른바 통장 돌리기를 하거나, 세금계산서를 허위로 부풀려 자부담금을 면제받은 사안을 지자체 기망으로 보아 유죄로 판단해 왔다(2013도9343). 이번 사건에서 무죄를 받은 농가들은 잔고 증명만을 위한 일시적 입출금이 아니었다. 정식 대여금 약정서와 할부금 상환 확약서를 쓰고 실제 자기 돈으로 차용금을 전액 갚아 최종 부담을 마쳤다는 점에서 기존 판례 사안과 결론이 갈렸다.
이번 판결은 지자체 보조사업에서 교부조건에 별도 제한이 없다면 자부담금 차용 자체가 원천 금지되는 것은 아니며, 실제 변제 여부가 부정수급 판단의 핵심 기준임을 분명히 했다. 앞으로 일선 지자체가 보조금 교부조건에 자기자본 조달 의무나 거래업체 차용 금지 조항을 명시할지 등 제도 보완 과제가 남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