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가격과 물량을 6년간 짬짜미해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대 과징금을 부과받은 제분사들이 과징금을 나누어 낼 수 있게 됐다. 일시 납부에 따른 자금난과 유동성 압박을 호소한 기업들의 신청을 당국이 받아들인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6년 9월 8일 7개 밀가루 제조·판매사업자의 부당한 공동행위 사건에서 주식회사 삼양사가 낸 과징금 납부기한 연장 및 분할납부 신청을 인용 의결했다(2026국카1866, 의결 제2026-185호). 공정위는 같은 날 한탑(의결 제2026-187호), 삼화제분(의결 제2026-188호), 대한제분(의결 제2026-189호), 사조동아원(의결 제2026-190호)이 각각 낸 과징금 납부기한 연장 및 분할납부 신청도 모두 인용 결정했다.
삼양사는 앞서 부과받은 과징금 947억8,700만 원을 한꺼번에 내면 자금난과 유동성 압박이 발생할 수 있다며 납부기한 연장과 분할납부를 신청했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 제103조 제1항과 같은 법 시행령 제86조 제1항에 따르면 공정위는 과징금이 매출액의 100분의 1 또는 10억 원을 초과하고, 일시 납부에 따라 자금사정에 현저한 어려움이 예상되는 경우 납부기한을 미루거나 나누어 내게 할 수 있다.
신청은 과징금 납부를 통지받은 날부터 30일 이내에 해야 하며, 공정위는 필요하면 담보 제공을 요구할 수 있다. 공정거래법 시행령 제86조 제2항과 제3항에 따라 납부기한 연기는 원래 납부기한 다음 날부터 2년을 넘길 수 없고, 분할납부는 각 납부기한 간격을 6개월 이내로 해 최대 6회까지 허용된다. 이번 인용 결정으로 삼양사 등 제분사들은 거액의 현금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재무 부담을 피하고 유동성 위험을 분산할 수 있게 됐다.
이번 과징금 처분은 7개 제분사의 장기간 담합이 적발되면서 내려졌다. 공정위는 5월 20일 국내 기업 간 거래(B2B) 밀가루 판매시장의 87.7%(2024년 매출액 기준)를 차지하는 7개 제분사에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총 6,710억4,500만 원을 부과했다. 이들 업체는 2019년 1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약 6년간 24차례에 걸쳐 공급가격과 물량을 담합한 혐의를 받았다. 업체별 과징금은 사조동아원 1,830억9,700만 원, 대한제분 1,792억7,300만 원, CJ제일제당 1,317억100만 원, 삼양사 947억8,700만 원, 대선제분 384억4,800만 원, 한탑 242억9,100만 원, 삼화제분 194억4,800만 원이다.
매일경제와 뉴스1에 따르면 총 6,710억4,500만 원은 2010년 6개 액화석유가스(LPG) 공급사 담합 사건 당시 부과액인 6,689억 원을 넘어선 담합 사건 사상 최대 규모이자, 전체 공정위 과징금 부과액 가운데 역대 2위 기록이다. 제분사들은 2018년 말 최대 수요처인 농심 납품을 둘러싼 출혈경쟁을 벌였다. 이후 2019년 11월 대한제분, CJ제일제당, 사조동아원과 삼양사 임직원이 경쟁 자제와 적정 가격 유지에 합의하며 담합을 시작했고, 나머지 3개사가 합류해 총 55차례 회합했다. 특히 정부가 가격 상승분의 80%를 지원한 2022년 6월부터 2023년 2월까지의 밀가루 가격안정 지원사업(총 471억 원 규모) 기간에도 보조금을 받으면서 담합을 유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제분업계는 2006년에도 8개사가 밀가루 가격 담합으로 과징금 약 435억 원을 부과받고 대표자가 검찰에 고발된 전력이 있다. 남동일 공정위 부위원장은 5월 20일 브리핑에서 “이번 담합의 관련 매출액은 5조6,900억 원으로 산정했다”며 “2006년 합병된 사업자를 빼면 완전히 동일한 사업자들이고, 20년 만에 또다시 담합이 적발됐다”고 처분 배경을 설명했다. 서울경제에 따르면 삼양사는 같은 날 공식 입장문을 내어 “시장 내 영향력이 제한적인 사업자였지만 일부 B2B(기업간 거래) 영업 관행과 내부 관리 체계에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는 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가격 정책과 영업활동 전반에 대한 내부 기준과 의사결정 절차를 전면 재점검하겠다”고 사과했다. CJ제일제당도 “경쟁사와의 접촉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제분협회를 탈퇴했다”고 발표했다.
과징금 분할납부와 별개로 시정명령 이행과 사법 절차는 이어진다. 7개 제분사는 공정위 명령에 따라 담합 이전 수준으로 가격을 독자 재결정해야 하며, 앞으로 3년간 연 2회씩 가격 변동 내역을 공정위에 의무 보고해야 한다. 공정위는 검찰의 고발 요청에 따라 1월 7개 제분 법인과 가담 임직원 14명을 고발해 형사 절차도 진행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