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하기 어려운 핵심 부품을 쥔 공급사가 완제품 대기업에 부품 선적과 기술지원을 끊고 최소구매·차액배상 조건의 장기계약을 강제했다면 공정거래법이 금지하는 거래상 지위 남용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외형상 납품업체라도 부품 대체 가능성과 시장 상황에 따라 대기업을 상대로 우월한 거래상 지위가 인정될 수 있다는 취지다. 아울러 강제된 약정에 따라 구매한 부품 매출액 전체를 과징금 산정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2026년 10월 27일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 인코포레이티드 등 4개사가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및 과징금납부명령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2026두31449).
사실관계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용 고성능 무선통신 부품을 독점 공급하던 브로드컴은 스마트기기 제조사인 삼성전자가 경쟁사 부품을 도입하려 하자 2020년 2월부터 압박에 나섰다. 삼성전자의 부품 구매주문 승인과 부품 선적, 기술지원, 생산을 잇달아 중단해 스마트기기 생산을 위협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2020년 3월 브로드컴과 3년 장기계약(LTA)을 맺었다. 2021년부터 3년간 매년 브로드컴 부품을 최소 7억6,000만 달러 이상 구매하고, 구매액이 약정 금액에 미달하면 차액을 배상한다는 조건이 포함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3년 6월 브로드컴이 신청한 200억 원 상생기금 조성 등의 동의의결(자진 시정방안)을 피해구제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이어 2023년 9월 21일 거래상 지위 남용행위로 보아 시정명령과 과징금 부과를 의결하자, 브로드컴은 이에 불복해 2023년 11월 소송을 냈다.
원심 판단
원심인 서울고등법원 행정6-1부는 2026년 5월 13일 공정위 처분이 적법하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2023누65275). 원심은 삼성전자가 브로드컴 부품을 다른 부품으로 대체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드는 점을 들어 브로드컴의 거래상 지위를 인정했다.
최소구매 및 차액배상 약정 때문에 삼성전자의 부품 선택권이 제한됐고, 경쟁업체 부품 채택 계획이 취소·축소되거나 브로드컴 부품을 미리 구매해야 하는 부담이 생겼으므로 불이익한 거래조건을 설정했다고 봤다. 부품 공급 중단이라는 이례적인 방법으로 계약 체결을 강제하고 경쟁업체의 거래기회까지 제한한 점에서 부당성도 인정했다. 나아가 삼성전자가 해당 약정에 따라 구매한 부품 매출액을 과징금 산정의 기준이 되는 관련매출액에 포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판단
대법원도 원심 판단에 법리오해가 없다고 보고 브로드컴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대법원은 구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23조 제1항 제4호에서 정한 거래상 지위에 관해 “일방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 또는 적어도 상대방과의 거래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 인정할 수 있다”며 시장 상황과 전체적 사업능력 격차, 상품·용역이나 거래관계의 특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구 공정거래법 시행령 제36조 제1항 별표 1의2 제6호 라목의 불이익제공행위가 성립하려면 “해당 행위의 내용이 상대방에게 다소 불이익하다는 점만으로는 부족하고 구입 강제, 이익제공 강요, 판매목표 강제 등과 동일시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방 당사자가 자기의 거래상의 지위를 부당하게 이용하여 그 거래조건을 설정 또는 변경하거나 그 이행과정에서 불이익을 준 것으로 인정되고, 그로써 정상적인 거래관행에 비추어 상대방에게 부당하게 불이익을 주어 공정거래를 저해할 우려가 있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법리에 비춰 부품이 대체되기 어려워 인정되는 브로드컴의 거래상 지위와 공급을 중단해 계약을 강제한 행위의 부당성을 모두 인정했다. 구 공정거래법 제24조의2 등에 따른 과징금 산정을 두고도 위반행위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상품의 종류와 용도, 대체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약정에 따라 구매한 부품 매출액을 관련매출액에 포함할 수 있다고 본 원심 판단을 수긍했다.
판결 의의
이번 판결로 원천기술을 보유한 부품 공급사가 완제품 대기업을 상대로도 부품의 대체 불가능성을 바탕으로 거래상 우월적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대법원에서 브로드컴의 공정거래법 위반이 최종 확정되면서 의무 구매 및 차액 배상을 강제하는 장기계약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관련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도 이번 판결이 근거로 쓰일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