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기한이 하루 지난 백신을 실수로 접종했더라도 환자에게 부작용이 없고 의사가 당일 보호자에게 사실을 알리는 등 성실히 수습했다면 의사면허를 정지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행정처분 규칙상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만으로 고의성이나 사후 태도를 따지지 않고 곧바로 면허정지 처분을 내릴 수는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 제1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2026년 10월 27일 소아청소년과의원을 운영하는 전문의 A 씨가 보건복지부장관을 상대로 낸 의사면허 자격정지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2026두30919). 원고는 법무법인 태신 윤태중 대표변호사가 대리했다.
사실관계
A 씨는 2023년 1월 10일 생후 6개월 영아에게 전날 유효기한이 만료된 B형간염 백신 주사제를 1회 접종했다. 법보신문에 따르면 A 씨는 접종 약 2시간 뒤 유효기한이 지난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즉시 영아의 보호자에게 연락해 경위를 설명한 뒤 재접종을 안내했다. 접종을 받은 영아에게 특별한 건강 문제나 부작용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A 씨는 관할 보건소의 사실조사에도 성실히 임했다.
보건복지부는 구 의료법 제66조 제1항 제1호와 구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에 따라 유효기한이 지난 의약품을 사용한 행위를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보고 2023년 7월 A 씨에게 의사면허 자격정지 3개월 처분을 내렸다. A 씨가 불복해 낸 첫 소송에서 법원은 감경 사유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 처분이라며 취소 판결을 확정했다. 그러자 보건복지부는 2024년 12월 기준 일수의 절반을 감경해 1개월 15일의 의사면허 자격정지 처분을 다시 부과했고, A 씨는 재차 소송을 제기했다.
1심·원심 판단
1심인 서울행정법원과 2심인 서울고등법원은 A 씨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원심은 의사가 유효기한이 지난 의약품을 사용하는 행위는 환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위험이 있고 의사를 향한 신뢰를 현저히 배신하는 행위라고 봤다. 아울러 A 씨에게 적어도 중대한 과실이 인정되고, 행정법규 위반 제재는 고의나 과실이 없더라도 부과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면허정지 처분이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판단
대법원은 구 의료법 제66조 제1항 제1호가 면허자격정지 대상을 의료인의 품위를 심하게 손상시키는 경우로 한정한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의료인의 품위 손상 행위의 한 유형에 속하는 비도덕적 진료행위의 개념 및 범위가 포괄적, 추상적인 반면, 법령상 의료인의 면허자격정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중 의료인의 품위를 심하게 손상시키는 경우에 한정되는 이상, 광의의 비도덕적 진료행위 모두가 곧바로 의료인의 품위를 심하게 손상시키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심한 품위 손상에 해당하는지는 진료행위의 내용과 행위자의 인식 및 개입 정도, 반복성, 공중보건이나 환자 안전에 끼친 영향, 부적절성이 밝혀진 경위, 행위 후 태도와 사후조치 등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이를 토대로 대법원은 백신 유효기한으로부터 만 하루가 지나기 전에 접종이 이뤄진 점, 영아에게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은 점, A 씨가 당일 스스로 보호자에게 연락해 경위를 설명하고 보건소 조사에 성실히 임한 점, 동종 위반 경력이 없고 A 씨의 고의 없이 소속 직원의 실수가 개입된 점 등을 짚었다. 재판부는 "원고의 행위는 의료인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볼 수는 있더라도 나아가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고자 하는 의료법의 입법목적과 사회통념상 일반인의 의료인에 대한 기대와 신뢰에 상당히 어긋나는 행위에 이를 만큼 의료인의 품위를 심하게 손상시키는 정도의 행위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판결 의의
이번 판결로 보건복지부령인 행정처분 규칙상 비도덕적 진료행위 항목에 형식적으로 해당하더라도, 상위 법률 요건인 심한 품위 손상에 이르지 않으면 면허정지 처분을 내릴 수 없다는 법리가 명확해졌다. 직원의 실수로 발생한 투약 착오를 숨기지 않고 보호자에게 먼저 알린 사후 대처가 자격정지 여부를 가르는 핵심 요소로 인정됐다. 향후 의료현장의 과실 사고 처리와 행정처분 실무에 기준이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