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청기나 인공와우를 쓰는 청각장애인과 고령 난청인이 앞으로 법정에서 사전 신청이나 별도 수신기 대여 없이 재판 내용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게 된다. 개인이 일일이 신청해야 했던 법정 내 청각 사법지원이 전국 법정에 기본 설비를 갖추는 보편적 체계로 바뀐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처장 노경필)는 2026년 11월 3일 대법원 무궁화홀에서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상임대표 직무대행 고선순, 이하 한국장총)과 '전국 법원 법정 내 보청기기 보조장비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11월 4일 밝혔다. 두 기관은 2029년 12월 31일까지 대법원과 각급 법원·지원, 시·군법원 등 전국 1,235개 법정에 보청기기 보조장비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동안 법정은 공간 구조상 소리가 울리고 여러 사람의 발언이 오가는 탓에 난청인이 어려움을 겪었다. 일반 보청기만으로는 마이크 음성과 주변 소음·잔향이 함께 증폭돼 재판 내용을 정확히 알아듣기 힘들었다. 기존 사법지원 제도 역시 당사자가 재판 전에 따로 지원을 신청하거나 전용 수신기를 빌려 휴대해야 하는 제약이 따랐다.

이번에 전국 법정에 도입되는 장비는 유도루프 방식이라 불리는 텔레코일 시스템이다. 법정 마이크의 소리를 자기장 신호로 바꿔 보청기·인공와우에 내장된 텔레코일로 직접 전달한다. 주변 소음과 잔향은 걸러지고 마이크 음성만 선명하게 들어온다. 이용자는 별도 수신기 없이 본인 보청기나 인공와우의 텔레코일 모드만 켜면 바로 쓸 수 있다.

이번 협약은 2025년 11월 11일 개정돼 2026년 11월 12일 시행되는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등편의법)에 맞춰 추진됐다. 개정 장애인등편의법 제16조 제1항과 제27조 제1항 제4호는 공공건물 및 공중이용시설에 갖추어야 할 편의시설을 종전 '보청기기'에서 '보청기기 및 보청기기 보조장비'로 넓혔다. 한국장총이 법정 내 장비 기탁을 자발적으로 제안했고, 대법원 기부심사위원회 승인을 거쳐 협약이 성사됐다.

협약에 따라 한국장총은 기탁물품을 구매해 관련 법령과 설치기준에 맞춰 전국 법정에 설치·검수하고, 고장 대응 등 사후관리 체계를 마련한다. 법원행정처는 각급 법원과 한국장총, 시공업체 사이의 소통을 지원하고 장비 이용 활성화를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협약 기간은 2029년 12월 31일까지며 필요하면 상호 협의로 연장할 수 있다.

장비가 깔리면 소송 당사자와 증인, 피해자는 물론 방청인까지 법정 내 지위와 상관없이 재판장의 소송지휘나 증인 진술을 정확히 듣고 재판에 참여할 수 있다. 발언을 잘못 알아들어 되묻는 일이 줄면서 진술의 정확성이 높아지고, 노화로 청력이 약해진 고령자도 혜택을 볼 전망이다.

고선순 한국장총 상임대표 직무대행은 "보청기기 보조장비 설치는 청각장애인뿐만 아니라 증가하고 있는 노인성 난청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생소한 법정 용어로 소통하는 것은 비장애인에게도 긴장되는 일인데 장애인들이 법률상 불이익을 받지 않고 재판 과정에 당당하게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장비 설치 못지않게 꾸준한 유지관리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난청인교육협회의 기존 공공시설 모니터링 조사에서는 안내 표지 부족이나 기기 미작동, 관리 직원 미숙으로 청취보조장비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사례가 잇따라 확인됐다. 법원행정처와 한국장총은 법정별 사전조사와 시공업체 선정을 거쳐 서울 소재 법원부터 순차로 설치해 2029년 말까지 전국 법정 구축을 마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