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당사자가 늦게 낸 증거나 서면을 법원이 직권으로 배제하는 원칙이 엄격해지고, 정당한 이유 없이 재판이 지연될 때 금전으로 보상하는 제도의 법제화가 추진된다.

사법정책연구원은 연구보고서 '재판의 지연 실태와 신속화 방안 - 민·형사 사실심을 중심으로'에서 재판 장기화의 주요 원인을 분석하고 소송 전 단계에 걸친 제도 개편 방안을 제시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취임 일성으로 재판 지연 해소를 최우선 과제로 꼽은 가운데 나온 종합 대책이다.

심리 부실 부른 구조적 요인

연구보고서는 재판 지연이 복합적인 원인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했다. 사실관계와 법률관계가 복잡한 사건이 늘어나고 변호사 수가 급증한 반면 법관 증원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 변호사 수는 2배 이상 급증했으나 각급 법원 판사 정원은 약 1.13배 늘어난 3,214명 선에 머물렀다. 여기에 법관 고령화와 법조일원화,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 및 사법행정권의 소극적 행사, 잦은 정기인사와 사무분담 변경이 겹쳐 사건 처리 유인을 떨어뜨렸다는 분석이다.

민사 1심 합의부의 목표 사건 처리 건수 하향 조정과 적시제출주의·집중심리 원칙 미준수, 잦은 기일변경과 추후지정을 법원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점도 기일 지연을 부추겼다. 2022년 대한변호사협회 설문조사에서는 응답 변호사의 90%가 최근 5년간 재판 지연을 직접 경험했다고 답했다.

실권효 엄격 적용과 판결서 간이화

보고서는 신속한 심리를 위해 절차적 통제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민사소송법 제146조(적시제출주의)와 제149조(실권효)를 엄격히 적용해, 고의나 중대한 과실로 늦게 제출한 공격·방어방법을 결정으로 각하하는 법원 통제를 활성화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변론·공판기일 전 준비기일을 내실화하고 영상재판을 확대하는 한편, 변론 전 증거조사(증거개시제도) 도입과 감정인 신문 필수화도 대안으로 들었다.

법관의 판결서 작성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이유 인용과 생략을 넓히는 판결서 간이화도 제시됐다. 표준 사건 처리 기간을 설정하고, 합의부 사건을 단독재판부로 넘기는 범위를 넓히면서 '1법원 1사무분담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는 제언도 담겼다.

재판지연보상과 입법 과제

재판 지연으로 권리 구제가 늦어진 소송 당사자를 위한 금전 구제책도 보고서에 포함됐다. 정당한 이유 없이 재판이 장기 미제에 빠질 때 국가가 손해를 보상하는 '재판지연보상 제도'와 '재판 신속을 위한 특별법' 제정 추진이 함께 권고됐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제3기 사법정책자문위원회를 출범시키며 감정제도 개선과 판결서 적정화, 복잡한 사건의 공판중심주의 적정 운영 방안 등 재판 지연 해소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법원 내부에서는 법관 증원 없이 속도만 강조되면 심리의 충실성을 해쳐 졸속 재판을 낳거나 실무 인력의 과중한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