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간 재직한 소방관에게 발병한 희소암을 두고 연구 자료 부족을 이유로 공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은 행정청의 처분은 위법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법정 추정 질병 목록에 없는 희귀질환이라도 의학적 근거 부족을 들어 기계적으로 요양 불승인 처분을 내리는 관행에 제동을 건 판결이다.
서울행정법원은 소방관 A 씨가 인사혁신처장을 상대로 낸 공무상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2026구합50865). 법원은 2026년 11월 3일 이 판결 요지를 주요판결 게시판에 공개했다.
사실관계
28년간 소방관으로 근무한 A 씨는 십이지장 유두부 부근에 생기는 담도·소화기계 희귀암인 바터팽대부암 진단을 받았다. A 씨는 공무 수행 중 발암물질과 유해환경에 노출돼 암이 발병했다며 공무상요양을 신청했다.
인사혁신처는 A 씨의 질병이 공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보고 요양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유병률이 낮은 희귀암이어서 직업성 노출과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의학적 연구나 역학조사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A 씨는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냈다.
재판부 판단
서울행정법원은 인사혁신처장의 요양 불승인 결정을 취소했다. 재판부는 역학조사나 의학적 연구 데이터 등 발병원인 자료가 부족한 희귀질환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연히 공무수행과의 상당인과관계를 부정해 공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은 처분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그간 희귀질환의 입증 책임을 근로자나 공무원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대법원은 2017년 9월 약 30년간 화재진압을 수행하다 소뇌위축증에 걸린 소방관 사건에서 "공무상 재해의 인과관계는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있으면 족하며, 유해물질 노출과 발병원인에 다른 사정이 없다면 인과관계를 추단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2017두47878). 서울고등법원도 2025년 2월 29년간 현장에서 근무한 소방관에게 발병한 희귀암인 골육종을 두고 연구 결과 부족을 이유로 불승인한 인사혁신처의 처분을 취소했다(2024누34018).
판결 의의
공무원 재해보상법 제22조의2에 따라 2023년 6월부터 공상추정제가 시행됐다. 위험직무 종사자가 유해 환경에 노출돼 특정 질병에 걸리면 공무상 질병으로 추정하는 제도다. 그러나 법정 추정 상병 목록이 혈액암이나 폐암 같은 다빈도 암 위주로 짜여 있어, 바터팽대부암 같은 희소암은 여전히 공무원이 직접 직무와의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참여와혁신에 따르면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방본부 등 소방 노조는 "공상추정제 도입 이후에도 법정 질병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희소암을 앓는 소방관들은 수천만 원의 소송비와 수년간의 입증 고통을 떠안고 있다"며 희귀질환 인정 범위 확대를 요구해 왔다. 이번 판결은 공상추정제 목록에 없는 희소질환이라도 장기 근속과 현장 유해물질 노출 경력이 있다면 자료 부족을 이유로 불승인 처분을 내릴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인사혁신처가 판결문 송달일로부터 2주 안에 항소하지 않으면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