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해 달아난 피의자에게 자수를 설득할 목적이었다고 주장하더라도, 숨을 장소와 통신장비를 제공했다면 범인은닉과 범인도피죄가 성립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피의자를 만류하려는 의도가 일부 섞였더라도 수사기관의 발견을 곤란하게 만든 객관적 지원 행위가 있다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 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범인은닉과 범인도피 혐의로 기소된 전 기업 회장 A 씨에게 징역 1년을, 범인도피 혐의로 기소된 수행비서 B 씨에게 벌금 500만 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2026년 9월 23일 확정했다(2026도12854).
사실관계
A 씨는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특검 수사를 받던 중 2025년 7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앞두고 도주한 전 기업 부회장 C 씨를 도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 씨는 C 씨를 경기 포천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이동시켜 숙박하게 하고, 경기 가평의 한 펜션을 10박 11일 동안 예약해 머물게 했다.
A 씨의 수행비서 B 씨는 A 씨 지시로 성명불상자에게서 휴대용 와이파이 기기인 데이터에그와 데이터 유심을 받아 C 씨에게 건넸다. C 씨는 이를 이용해 수사기관의 위치 추적을 피하며 통신을 이어간 것으로 조사됐다.
재판에서 A 씨 측은 "도피 의사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별장에 오게 했고, 도망치지 말고 수사를 받으라고 설득하려던 목적이었으므로 은닉의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1심·원심 판단
1심인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A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B 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심인 서울고등법원은 공소장 변경 등을 반영해 A 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 씨가 별장으로 이동시키기 전 이미 가평 펜션을 장기 예약해 둔 점, 위치 추적을 피할 통신장비를 제공한 점을 들어 은닉과 도피의 고의가 충분히 인정된다고 봤다. B 씨에 대해서는 식사 제공 등 일부 행위를 무죄로 판단해 벌금 500만 원으로 감형했다.
대법원 판단
대법원 역시 원심 판단을 그대로 인정해 상고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A 씨의 범인은닉 행위와 고의, 피고인 B 씨의 범인도피 고의와 두 사람의 형법상 공동정범 성립을 모두 수긍했다. 형법 제151조 제1항은 벌금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를 은닉 또는 도피하게 한 자를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이번 판결은 수사 대상자에게 은신처나 차명 통신수단을 제공한 경우, 설득 명목을 내세우더라도 범인은닉·도피죄의 고의가 인정돼 실형을 면하기 어렵다는 기준을 명확히 했다. 상사의 지시로 통신장비를 전달한 수행원 역시 범인도피의 공동정범 책임을 피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