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을 받으려다 사기범에게 통장 계좌와 비밀번호를 넘겨준 뒤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돼 거액의 손해배상 채무를 떠안았더라도, 법원의 개인파산 및 면책 절차로 남은 빚을 면제받을 수 있다. 범죄에 적극 가담한 고의범이 아니라 사기에 속은 과실 방조자라면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상 비면책채권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최근 온라인 법률 상담 창구에는 약 10년 전 사회 초년생 시절 대출 사기에 속아 통장과 비밀번호를 넘겼다가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에게 민사소송을 당해 약 2억 원을 갚아 온 A 씨의 사연이 올라왔다. 당시 20대 초반이던 A 씨는 법원에서 날아온 소장을 받고도 대응 방법을 몰라 답변서를 내지 않았다. 결국 원고 청구 100% 승소인 무변론 패소 판결이 확정돼 신용회복위원회를 거쳐 10년째 빚을 갚고 있었다.

금융기관을 사칭해 신용등급을 올려 대출을 해주겠다거나 거래 실적을 만들어 한도를 늘려주겠다며 통장과 체크카드, 비밀번호를 가로채는 보이스피싱 수법은 꾸준히 발생한다. 금융감독원 금융사기대응단은 어떠한 경우에도 대출 실행을 명목으로 통장이나 체크카드, 비밀번호를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대여해서는 안 되며, 양도 행위 자체로 형사처벌 및 거액의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 제3항 제1호 및 제49조 제4항 제1호는 대가를 수수·요구·약속하면서 또는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 접근매체를 양도하거나 대여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 시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형사처벌과 별개로 해외에 있는 보이스피싱 총책을 잡지 못한 피해자들은 입금 계좌 명의인을 상대로 민법 제760조에 따른 공동불법행위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 대법원은 통장 등 접근매체를 양도한 명의자에게 민법 제760조 제3항의 과실 방조로 공동불법행위 손해배상책임을 물으려면 엄격한 요건이 필요하다고 봤다. 양도 당시 구체적 사정에 비추어 통장이 불법행위에 사용되고 이를 용이하게 한다는 점을 명의자가 예견할 수 있었고, 양도와 손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012다84707). 과실 방조 책임이 인정되더라도 법원은 사기범의 말에 속아 확인 절차 없이 송금한 피해자의 과실을 참작해 통장 명의인의 배상 책임을 피해액의 30%에서 50% 또는 70% 수준으로 제한한다(2013다86489).

문제는 소장을 받은 통장 명의인이 법률 지식이 부족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민사소송법 제257조에 따라 피고가 소장 부본을 송달받은 날부터 30일 이내에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법원은 청구의 원인이 된 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과실상계 판단 없이 원고의 청구금액 전액을 인정하는 무변론 판결을 선고한다. 소송에 정상 대응해 과실상계를 다투면 배상 책임이 통상 30%에서 50% 선으로 감축되지만, 무변론 판결이 내려지면 원금 100%와 연 12%에서 20%의 소송촉진법상 법정 지연손해금까지 전액 부담하게 된다.

이미 확정된 민사 판결을 재심으로 뒤집기는 어렵다. 민사소송법 제456조는 판결이 확정된 뒤 5년이 지나면 재심의 소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공문서 위조 등 엄격한 재심 사유가 증명되지 않는 한 확정 판결을 취소할 수 없다. 법원으로부터 민사 소장이나 지급명령 정본을 송달받았다면 30일 이내, 지급명령은 2주 이내에 반드시 답변서나 이의신청서를 제출해 과실상계 등을 다투어야 100% 패소를 막을 수 있다.

무변론 판결 확정 후 제척기간이 지나 거액의 채무를 장기 분할상환하고 있다면 법원에 개인파산 및 면책을 신청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채무자회생법 제566조는 면책을 받은 채무자의 책임을 면제하면서, 제3호에서 채무자가 고의로 가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만을 비면책채권으로 규정한다. 대한법률구조공단 및 파산 전문 법조계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적극 가담한 고의범이 아니라 대출 사기에 속아 통장을 넘겨준 과실 방조자라면 구제 길이 열려 있다고 설명한다. 채무자회생법 제566조 제3호의 비면책채권에 해당하지 않아 법원 개인파산과 면책 절차로 잔여 채무를 면책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과실 방조에 따른 손해배상 채무를 면책받으려면 본인의 행위가 고의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판결문과 불기소나 기소유예 등 형사처분 결과를 갖춰 법원에 신청해야 한다. 무료 법률 조력이나 채무자 회생 상담은 대한법률구조공단(국번 없이 132)이나 신용회복위원회, 서민금융진흥원에서 지원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