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부친이 남긴 빚을 물려받지 않으려고 상속을 포기했더라도, 훗날 조부모가 숨졌을 때 별도 조치를 하지 않으면 부친의 채무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 있다. 민법상 대습상속은 피상속인이 전혀 다른 별개의 상속이어서 종전 상속포기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법원의 확립된 판단이다.
상속 순위를 규정한 민법 제1000조에 따르면 자녀와 배우자가 1순위 상속인이 된다. 상속인이 될 직계비속이 상속개시 전 먼저 사망하면, 민법 제1001조에 따라 그 직계비속의 자녀(손자녀)가 사망자의 순위에 갈음해 상속인이 되는 ‘대습상속’이 개시된다. 부친이 사망하면서 남긴 채무를 자녀가 포기하더라도, 살아있던 조부모에게 넘어갔던 채무가 조부모 사망 때 다시 손자녀에게 대습상속되는 구조다.
대법원 "상속포기는 사람별로 별개 절차"
실제 법정에서도 관련 분쟁이 있었다. B 씨 사망 후 배우자 A 씨와 자녀들은 빚이 상속재산보다 많아 상속을 전원 포기했다. 이후 2순위로 채무를 넘겨받은 모친 C 씨마저 숨지자 보증기관이 손자녀들을 상대로 구상금 청구 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원고 승소 취지로 판결했다(2014다39824).
당시 2심 재판부는 법률 지식이 없는 상속인에게 이미 포기했던 빚이 조모 사망으로 대습상속된다는 점까지 예상해 다시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 민사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원심을 깨고 사건을 창원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피상속인에 대한 상속포기를 이유로 대습상속 포기의 효력까지 인정한다면 법률관계를 획일적으로 처리하려는 상속포기 제도가 잠탈될 우려가 있다"며 "상속포기의 효력은 해당 피상속인의 상속에만 미칠 뿐 대습상속에까지 미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피상속인별로 상속 승인이나 포기 절차를 각각 밟아야 한다는 취지다.
방치하면 단순승인 간주…3개월 기한 엄수
민법 제1019조 제1항에 따르면 상속인은 상속개시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3개월 내에 단순승인이나 한정승인, 포기를 해야 한다. 민법 제1026조 제2호는 이 기간 내에 한정승인이나 포기를 하지 않으면 단순승인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한다. 조부모가 사망한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법적 조치 없이 3개월을 넘기면 조부모의 고유 채무는 물론 부친에게서 넘어갔던 빚까지 모두 떠안게 된다.
대법원은 2023년 전원합의체 결정(2020그42)에서 부모가 사망하고 배우자와 자녀 중 자녀 전원이 상속을 포기했을 때 손자녀에게 채무가 대물림되지 않고 배우자가 단독 상속인이 된다고 판례를 바꾼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직계비속 전원이 상속을 포기한 사건에 국한된다. 선순위자가 조부모보다 먼저 사망해 발생하는 대습상속에서는 2017년 선고된 대법원 판례가 유지되고 있어 별도 포기 신고가 필수다.
대응 절차와 준비 서류
조부모의 채무 대물림을 피하려면 조부모의 사망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관할 가정법원에 상속포기 또는 한정승인 심판을 청구해야 한다. 신청할 때는 가족관계증명서, 기본증명서, 주민등록등본, 조부모의 제적등본 또는 사망진단서, 상속포기 신청서 등이 필요하다.
만약 사망 사실을 알고도 3개월이 지나 채무 독촉장을 받는 등 뒤늦게 빚의 존재를 알게 됐다면 민법 제1019조 제3항의 ‘특별한정승인’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상속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한다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3개월 내에 알지 못했다면,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 내에 가정법원에 특별한정승인을 신청해 구제받을 수 있다.
반대로 조부모에게 물려받을 부동산이나 예금 등 적극재산이 빚보다 많다면 부친의 빚을 포기했더라도 대습상속권을 행사할 수 있다. 대습상속인은 삼촌이나 고모 등 다른 공동상속인과 동등하게 부친의 상속분만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