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조작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피해자가 재심에서 ‘무죄’가 아닌 법령 폐지에 따른 ‘면소’ 판결을 받았더라도, 원래 무죄 판결을 받았을 개연성이 증명된다면 국가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실체 판단 없이 면소로 종결됐다는 이유로 배상을 거부해 온 하급심 판단을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 민사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2026년 9월 23일 A 씨 등 피해자와 유족 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2024다202935).
사실관계
A 씨 등은 1983년 9월 22일 발생한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에 영장 없이 연행됐다. 이들은 최장 한 달 넘게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고문과 폭행을 당했고, 국가보안법·반공법 및 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구 집시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3년형의 유죄 판결을 확정받고 복역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10년 6월 30일 경찰의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를 확인하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고, 피해자들은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법원은 2019년 10월 A 씨의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는 고문 자백의 증거능력을 배제해 무죄를 선고했다. 구 집시법 위반 혐의는 1989년 법 개정으로 처벌 조항이 폐지됐다는 이유로 형사소송법 제326조 제4호에 따라 면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에 피해자들과 유족은 2020년 8월 총 18억3,000여만 원 상당의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심·원심 판단
1심과 원심은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혐의에 대해서만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면소 판결이 내려진 구 집시법 위반 부분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원심 재판부는 재심에서 면소 판결을 받지 않았더라도 무죄 판결을 받았을 고도의 개연성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원심은 소멸시효 완성도 배상 기각 사유로 들었다. 수사 과정의 불법행위에 따른 3년의 단기소멸시효 기산점을 피해자들이 출소한 1984년 3월 또는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진 2010년 6월로 보아, 2020년에 제기된 소송은 이미 시효가 완성됐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판단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형벌법령 폐지로 면소 판결이 확정됐더라도 면소 사유가 없었더라면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따라 무죄가 선고됐을 것이라는 점이 고도의 개연성으로 증명됐다면 수사기관의 위법행위와 유죄판결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당초 공소사실 내용과 증거 유무, 재심개시결정 이유, 재심 판결 경위, 구금에 관한 형사보상결정 여부 등을 종합할 때 원고들의 구 집시법 위반 공소사실은 면소 사유가 없었더라면 무죄가 선고되었을 고도의 개연성이 증명됐다”고 판단했다.
국가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산점에 대해서도 기준을 명확히 했다. 재판부는 민법 제766조 제1항의 단기소멸시효 기산점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는 ‘권리행사의 객관적·합리적 기대가능성’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짚었다.
재판부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재심으로 유죄판결의 확정력이 배제되기 전부터 수사 단계의 피해와 유죄판결 복역 피해를 구분해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재심 면소판결이 확정된 시점부터 비로소 단기소멸시효가 진행한다”고 판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