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밀린 전기요금이나 휴대전화 요금, 병원비를 내려고 고인의 통장에서 예금을 먼저 인출하려는 유족이 적지 않다. 사망신고를 아직 하지 않았거나 유일한 상속인이라는 이유로 통장과 도장을 들고 은행을 찾는 식이다. 하지만 법률 전문가들은 사망신고 전이라도 고인의 예금을 임의로 빼 쓰면 감당하기 힘든 빚을 고스란히 떠안거나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민법 제997조에 따르면 상속은 피상속인이 사망한 순간 곧바로 개시된다. 피상속인이 생전에 맡긴 위임 계약과 대리권 역시 민법 제690조에 따라 사망과 동시에 효력을 잃는다. 사망신고 여부와 무관하게 고인 명의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은 사망 시점부터 공동상속인 전체의 상속재산으로 묶인다. 고인이 생전에 구두로 돈을 가져가라고 유언했더라도 법정 유언 방식을 갖추지 않았다면 예금을 바로 넘겨받을 권리가 생기지 않는다.

가장 큰 위험은 민법 제1026조 제1호가 규정한 '법정단순승인'이다. 상속인이 상속재산을 처분하면 고인의 재산뿐 아니라 빚까지 전부 물려받는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본다. 대법원도 상속인이 피상속인의 채권을 추심해 변제받는 행위는 상속재산 처분행위에 해당하며, 이후에는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2009다84936).

고인에게 숨겨진 빚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100만 원 안팎의 소액을 인출해 공과금을 냈더라도 상속재산 처분으로 인정될 수 있다. 뒤늦게 수억 원대의 빚이 발견되더라도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신청할 수 없어 상속인이 자신의 고유재산으로 고인의 채무를 전액 갚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형사책임 문제도 뒤따른다. 사망신고 전 금융기관이 고인의 사망 사실을 모르는 틈을 타 은행 창구에서 출금전표를 고인 명의로 작성하면 형법 제231조 사문서위조죄와 위조사문서행사죄, 형법 제347조 사기죄가 성립할 수 있다. 현금카드로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돈을 찾거나 계좌이체를 하면 형법 제347조의2 컴퓨터등사용사기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실제로 광주지방법원은 부모 사망 직후 은행에서 고인 명의 계좌에 접근해 3,800만 원을 인출·이체한 상속인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피해자가 가족이 아닌 금융기관이어서 친족상도례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역시 인출한 돈을 장례비로 썼더라도 사기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선고유예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상속 전문가들은 부모가 사망했을 때 가장 먼저 행정안전부의 '안심상속 원스톱 서비스'를 신청해 금융·부동산·세금·채무 내역을 종합 조회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채무가 재산보다 많거나 불분명하다면 상속개시가 있음을 안 날부터 3개월 이내에 가정법원에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마쳐야 한다.

예금을 찾아 장례비나 공과금으로 써야 한다면 임의 인출을 멈추고 은행의 정식 상속예금 지급 절차를 밟아야 한다. 사망진단서, 망인 기준 기본증명서(사망사실 기재), 가족관계증명서, 상속인 신분증 등을 은행에 제출해 합법적으로 수령하는 방식이다. 금융당국은 제출 서류를 표준화하고 단독 상속인의 요청으로 지급 가능한 소액 상속재산 간소화 기준을 기존 100만 원 이하에서 300만 원 이하로 완화해 운영하고 있다.